공백으로만 기록되는 역사가 있다. 행간에만 떠도는 목소리가 있다. 이를테면 어떤 기억 같은, 기억 속의 진실 같은, 진실 속의 비운† 같은, 비운 속의 고독 같은, 고독 속의 기도 같은, 기도 속의 눈물 같은, 눈물 속의 꿈 같은, 꿈 속의 공허 같은. 풍화된 말들은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누군가의 사무친 바람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한 줄의 새까만 글씨는 ...
유구히 흐르는 시간의 강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 시간의 강은 늘 같은 강이었다. 변하지 않는 것 위에서 변해가는 것을 좇으며 우리는 노를 저었다. 얼마나 많은 핏방울을 더해야 바다에 닿을까, 그가 물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와 함께 흐르고 싶었으나 그는 이미 아스러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영원이 깃든 물결에 그는 천천히 익사하다가, 지층이 씻어져 내려가듯 ...
우리는 그 시절, 사랑은 상실이 가라앉은 오래된 자국이라고 믿었다. 감히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말을 나는 객담처럼 삼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9. 열병] 기적은 없었다. 모든 것은 그날 엘빈이 한 말대로 흘러갔다. 며칠 뒤 왕정은 긴급 토지 정책을 시행했다. 식량 확보를 최대화한다는 명목이었다. 피난민들은 황무지 개척에 동원됐지만, 땅이 언 겨울이었다....
아무리 곱씹어도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 그는 이미 그날부터 무너지고 있었던 걸까. [8. 상실] 월 마리아가 뚫렸다. 전에 없는 인류 최악의 상황이었다. 거리는 피난민과 가족을 잃은 고아들로 넘쳤고, 벽 안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이 모든 사태 속에서 엘빈은 조사병단 13대 단장으로 취임했다. 명예로운 임명식도 축하도 없었다. 곳곳에선 비명과...
그날 그것은 다짐이었을까, 그가 스스로에게 건 저주였을까.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7. 전조] 엘빈은 별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밤늦게까지 서류작업을 하다가도 그는 곧잘 숙사 뒤뜰을 산책하며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병영은 한적한 평원에 자리하고 있어서 하늘이 맑은 날에는 별이 쏟아질 것처럼 보였다. 때때로 그는 그렇게 한참동안 별을 보다 몸이 얼어...
꿈에 젖은 푸른 눈에 빠져 깊은 잠을 청하던 나날이었다. [6. 무용] 이슬, 꽃, 햇살, 웃음, 눈. 그날 이후 내가 엘빈에게 배운 글씨는 통 이런 것들뿐이었다. 살면서 다시 쓰긴 할까 싶은 글자들을 쓰며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보탬이 되려면, 서류작업에 필요한 단어를 쓰는 법을 알아야 했다. 나는 그가 왜 거인, 조사병단, 입체...
헤매이는 기억 속에 다시는 부르지 못할 그 고운 이름을 아로새긴다. [5. 이름] 눈이 녹고 들판에 푸릇한 새싹이 날 무렵, 엘빈은 샤디스 단장과 함께 미트라스 왕도를 다녀왔다. 저녁 늦게 돌아온 그는 다음날 조례 시간이 되자 붉은색 두루마리 문서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언뜻 봐도 화려해 보이는 물건이었다. 마당에서 각자 몸을 풀며 흩어져 있던 병사들이 호기...
[4. 첫눈] 다음날 아침 일찍, 엘빈이 방문을 두드렸다. 웬일인지 머리도 부스스한 상태로 옷을 대충 껴입고 나온 모양이었다. 그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보여줄 것이 있다며 어서 나와 보라고 말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두꺼운 병단 외투만 걸친 채 그를 따라갔다. 마당에는 밤사이 내린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장관이었다. 온 세상이 하얀 빛으로 가득 찬 것처...
그리워할수록 죄가 된다고 엘빈은 말했다. 그래서 그는 평생을 죄인처럼 살았던 것일까. [3. 유고] 팔런과 이자벨이 죽고 한동안 엘빈은 나를 어색해했다. 가끔 대화를 나눌 때면 말재주가 좋은 그답지 않게 모두 어정쩡하기만 하였다. 내심 죄책감에 휩싸여있는 것이 분명했다.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아니, 나는 너를 원망할 자격도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에게...
나는 그날 어떤 선택을 해야 옳았을까. 우리는 잊어선 안 될 것을 잊었고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했으니, 어쩌면 결말은 정해져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2. 선택] 잡히는 것이 우리의 작전이었으므로 나는 적당히 쫓기다가 항복했다. 예상외로 쓸만한 조사병단의 움직임에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나를 잡은 금발의 남자가 자신을 엘빈이라고 소개했다. 조직의 간부...
[1. 망각] 떠올리려고 하면 사고가 멈춰버리는 기억이 있다. 아득히 먼 처음의 기억이 그렇고 너무도 끔찍한 악몽이 그렇다. 케니라는 남자는 그것을 정신의 부유물이라 불렀다. 그러면서 그는, 그것들이 언젠가 약해진 정신을 잠식하는 독이 될 테니 잊으라고 했다.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흥분한 남자의 고함, 멀리서 들리는 깔깔대는 교성, 시끄러운 음악과 작은 한...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끄적끄적.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리바이는 참 상냥한 사람이구나. 물론 그의 말투와 행동거지가 조금은 거칠고 난폭한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건 그가 지하세계 출신이라는 점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겠죠.. 리바이가 경험한 지하세계는 약육강식이 당연하고 폭력만이 답이 되는 세상이었어요. 그건 케니가 한평생 봐왔던 세상의 모습이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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